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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탐방 이승준 (공대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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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탐방 이승준 (공대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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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필
(@keiusain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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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 starter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고 보름 쯤 지난후, 지금은 북한땅인 경기도 개풍군 임한면에서 조선 태종대왕의 21대 후손으로, 또 여러 대에 걸친 종갓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집안 어른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다고 할머님과 부모님께서 자주 말씀해 주셨다. 봄에 집 앞의 나즈막한 산에 올라 할머니께서 꺾어주신 싱아의 새 순을 입속에 물고 그 상큼한 신맛을 음미(?)하다가 싫증이 나면 언덕에 올라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위에 바람이 일어 만든 잔물결들과 그 물결들 위에서 영롱하고 눈부시게 반사되는 햇빛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던 기억, 머슴할아범의 등에 업혀 우리 인삼밭에 가서 한나절을 보낼 때 일꾼들이 삼을 캐며 구성지게 부르던 노랫소리를 듣던 기억, 때로는 엄하셨으나 항상 따뜻하시고 자상하신 아버님에게 천자문을 배우던 기억 등이 아직도 내 유년기의 즐거웠던 추억의 단상들로 남아있다. 내가 다섯살이 되던 해에 김일성이 발발한 한국전쟁은 그런 우리의 모든 것을 뿌리채 파괴해버렸고, 어린 나는 처음으로 공포와 배고픔을 알게 되며 처참한 주검들까지 보게 되었다. 다행히 할머님을 비롯한 우리 전 가족은 머슴할아범 식구들과 같이 무사히 1.4후퇴때 남하하여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의 한 친척집에 잠시 머물며 혹시 통일이 되면 강 건너 지척에 있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그것이 불가능함을 아신 아버님은 머슴 가족을 강화도의 지인에게 보내 농사일을 돌보게 하고 우리는 서울로 이주하여 나는 고촌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마포구 아현동에 있는 아현국민학교로 전학와 졸업하고 경복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경복고등학교 2학년 후반부터 서울대 각 단과대학에서 수학하시던 고교 선배님들이 학교를 방문하여 각자가 다니던 단과대학을 소개하며 우리들 자신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현명하게 과선택을 하라며 홍보하는 것에 설득당해 서울공대에 64학번으로 입학하여 기계공학과에서 내가 존경하는 이택식 교수님 지도하에 학사/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육군사관학교 교수증원에 필요한 특수간보생으로 선발되어 논산과 광주에서 사병과 장교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중위로 임관하여 육사 교수부 병기공학과 조교수로 생도들에게 기계공학을 3년간 가르치며 대위로 1975년 8월에 군복무를 마쳤다. 제대 1년여 전부터 육사 교수부에서 같이 근무하던 특수간보생 동기들이 유학 준비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다가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나도 뒤늦게 부랴부랴 준비하던 중 UCLA에서 흔쾌히 Research Assistance 장학금을 준다기에 제대한 후 바로 UCLA로 가서 Heat & Mass Transfer (열과 질량 전달) 전공, Chemical Engineering 과 Computer Science 부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장학금을 주겠다는 좋은 소식과 함께 입학허거서를 받고나서도 몰랐으나 UCLA에서 한 반년동안 공부하고 연구하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에서 Heat & Mass Transfer 분야에 출중한 석학 두 분이 미국으로 오시는데 Professor Eckert 께서는 University of Minnesota에 정착하여 연구와 후학에 힘쓰셨고, Professor Boelter 께서는 기후가 좋은 UCLA에 정착하여 오랫동안 연구와 후학에 힘쓰신 후에 퇴직하셔서 UCLA의 main engineering 건물은 그 분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Boelter Hall 이라고 명명하였다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 나는 Boelter Hall에서 내 지도교수의(Radiation Heat Transfer, 특히 Gas Radiation Heat Transfer 분야의  일인자셨던 Professor D. K. Edwards) 강의도 듣고 연구과제도 수행하는 한편 다른 기라성같은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며 필요할 때면 언제나 그분들을 만나 질문과 토론을 하고 조언을 구할수 있었으니 지금도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시절이 비록 가난한 유학생이였지만 UCLA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박사학위를 받을 때가 아니였나 생각된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학창시절 훌륭한 은사님을 많이 만나서 그들로부터 학문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행운을 누리며 살아온것 같다. 한가지 아직도 죄스러운 것은 서울공대 기계과 이택식 교수님이나, 나를 꼭 Mr. Rhee 라고 불러주시다 학위를 받는 순간 그 자리에서 Dr. Rhee 라고 불러주시던 UCLA의 Edwards 교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모두 늦게 연락을 받아 두 분의 장례식에 조차 참석을 못하고 말았다.

학위논문이 거의 완성되었던 1979년말경 졸업 후 귀국하여 일 할 직장을 찾기 시작했는데 아버님께서 박대통령 시해후 정국이 어수선하니 한 일이년 더 미국에 체류했다 귀국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이니 한번 검토해 보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하여 Post Doc도 고려해 보았으나 몇           년전부터 UCLA에 와서 내 지도교수님을 만난 후에 나를 점심식사에 초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눈 뒤 입사원서를 주며 학위 취득후에 꼭 Bound Brook, New Jersey에 있는 Union Carbide Corporation (UCC) Polyolefins Division R&D에 입사하여 같이 일해보자던 Associate Director 생각이 나서 전화로 입사원서를 작성하여 보내겠다고 했더니 무척 반기며 원서는 나중에 작성해도 되니 당장 와서 면접을 하라고 권하셨다. 얼떨결에 동부에 처음 와서, 그것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석유화학 회사의 박사학위 소지자들과 면접을 하게 되니 무슨 질문을 받을까 무척 긴장되었으나 모든 면접의 내용은 UCC는 굴지의 global 회사고 우리는 당신의 능력을 잘 알고 당신을 좋아하며 당신과 같이 일하고 싶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고, HR Director도 나와 내 가족들의 영주권을 포함한 모든 법적인 문제들을 회사가 다 해결할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학위 받는 즉시 입사하여 회사에 많은 기여를 해주기 바란단다. 박사학위 논문을 셋으로 쪼개서 세개의 학술지에 원고를 보내고 1980년 8월 졸업식에 참석한 후 가족과 같이 New Jersey로 이사와 UCC 연구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입사 당시 UCC는 UNIPOL Process라 불리우는 Polyethylene (PE) plastics 제조 공정과 생산품을 개발하고 특허를 받아 technology licensing 사업을 키워나가며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고 기술면에서는 타 회사들의 추종을 불허 할 때였다. 그렇게 엄청난 기술력있는 회사의 좋은 연구소에서 훌륭한 동료들과 같이 일하며 매일 새로운 지식을 배울수있던 나는 그 과정이나 결과에 무척 만족했고 그결과 나도 많은 특허를 받았고 그 중 여러 특허들은 상용화 되었다. UNIPOL Process의 중심 기술은 gas fluidized-bed reactor (가스 유동층 반응기)를 낮은 압력과 낮은 온도에서 운전하여 고분자 풀라스틱을 생산하는 기술인데 내가 20년 넘게 근무했던 당시 PE 생산기술 개발을 완성한 후 Polypropylene (PP) 생산기술을 개발하여 상용화시켰고 마지막으로 Ethylene-Propylene-Diene Monomer rubber (EPDM 인조고무) 생산기술을 개발하여 상용화단계까지 갔었다. 내가 연구원 이었을때 기술적인 면에서 이룬 많은 성과 중에서 가장 자랑할만하고 보람된 성과는 EPDM 인조고무를 UNIPOL 공정에서 생산할수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상용화 단계까지 끌어 올려 내 특허가 1999 Thomas Alva Edison Patent Awards Ceremony에서 R&D Council of New Jersey로 부터 Special Recognition Award 를 받아 회사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 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불행하게도 Union Carbide는 1984년 12월에 인도의 Bhopal에 있던 살충제 제조공장에서 큰 사고가 발생한 이후 생존을 위해 Polyolefins 사업을 제외한 많은 다른 사업을 처분하게 되었으나 결국 2001년에 Dow Chemical에 흡수되어 나는 2003 말까지 Dow에서 일 한 후, 2004년에 대전에 소재한 LG Chem 연구원의 Polyolefins 연구소에서 VP/R&D Director로 일년간 일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그 일년동안은 세계에 내놓아도 하나도 뒤지지 않을 회사의 연구원에서 내 생에에서 가장 바쁘게 가장 많은 일을 했고 또한 술을 가장 많이 마셨던 한해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소박한 성품을 지니셨던 구회장/부회장님들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하게 된다. 그후 미국으로 돌아와 2005년 초부터 head hunter 들에 끌려 Pactive, Sunoco Chemical과 Formosa Plastics를 거친 뒤 2014년 10월 부터 Houston에 소재한 SABIC US Headquarter로 옮겨 Chief Scientist로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SABIC은 Saudi Arabia의 Riyadh에 본사를 두고 미국, 유럽, 아사아에 local headquarter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global 석유화학회사로 한 회사 단위로 볼때 UNIPOL Process 공장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어 그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증진시킨 경험이 많은 인력이 필요할 때 head hunter를 통해 나를 찾은 거 같다. 지난 10년동안 Houston에서 유럽과 중동을 오가며 젊은 과학자들을 모아 팀을 꾸려 주로 기술개발 및 생산성향상 project 들을 수행해왔고 젊은 과학자들을 위한 technical training과 mentoring을 통해 기술/지식 이전 등등의 일을 하며 바쁜 생활을 하다 지금은 뉴저지 집으로 돌아와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으며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내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는 말을 가끔 듣는데 그것은 젊은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같이 일을 하다 서로 부디끼며 머리씨름도 하고 또 그들에게서 항상 새로운것을 배울려고 노력하며 항상 최선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노력하는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아내와의 첫 만남은 1970년 말내 고교 동창이 자기의 사촌 여동생과 친구들이 우리가 주말에 서울 근교에 등산할 때 같이 가면 안전하고 좋겠는데 그래도 되겠냐고 물어와 일단 누구들인지 한번 만나보아야 되겠다고 하여 주선된 일종의 group meeting에서였다. 학교에서 연주가 늦게 끝나서 지각했다며 고개를 숙이며 나타난 동창 사촌동생의 첫인상은 날씬하고 큰 키였는데 자기 몸집보다 큰 것처럼 보이는 첼로를 가느다란 팔과 손으로 움켜잡고 다방을 들어서는 모습이 자칫 넘어질 것 같아 불안해 보였다. 당시 그녀는 서울 음대 기악과 2학년 재학중 (69학번) 나는 대학원 이학년으로 무애건축설계사무실 설비팀에서 서울대학병원 냉난방과 수술실 설비 설계를 도와주며 한편으로는 바쁘게 석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긴 이야기를 줄이자면, 우리는 처음에는 구릅으로 산행을 했고 구릅이 형성되지 않을때면 둘이서 등산을 하며 가까와졌는데 그 큰 첼로를 들고 다니는것이 항상 불안하고 안스러워 광화문에서 만났을때면 언제나 그것을 내가 들고 이야기를 나누며 청운동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 주곤 했다. 나이차 때문인지 그녀의 나에대한 호칭은 한동안 “이보세요 아저씨”였고 나 또한 그녀를 “어이 꼬마야“라고 불렀다. 아내에게 얼마전 요즘 젊은아내들이 남편들 한테 쓰는 호칭으로 날 한번 불러보라고 했다가 눈흘김만 받았다.

아내가 학교를 졸업한 1973년 봄, 나의 육군사과학교 교수부 병기공학과 조교수시절, 우리는 결혼했고 일년 후에 큰 아들이 태어나 양가 부모님들을 기쁘게 해드렸으나 태어난지 일년도 채 안돼 우리 세 가족이 LA로 왔으니 부모님들이 많이 섭섭해 하셨다. 둘째아들은 UCLA 병원에서 막내인 딸은 NewJersey에서 태어났다. 큰아들은 결혼하여 Manhattan에 살며 큰 금융회사의 Sr. VP로 일하고 있고, 얽매이기 싫어하는 둘째아들은 미혼으로 우리집 가까이 살며 사업을 하고, 딸도 아직 미혼으로 San Diego에 거주하며 Deputy Attorney General of California로 일하고 있다.

1946 북한의 개성과 서울 사이에 위치한 북한지역인 개풍군에서 출생하였다.  5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미군이 다리 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 끔찍한 목격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전쟁 중에 가족들이 남하하였는데 아버님은 언제 고향에 돌아갈지 모르니 고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김포 고천면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님이 통일 고향으로 다시 가는 것이 빠른 시일내에는 힘들다고 판단하시고 서울로 이주하게 됨에 따라 나는 국민학교를 고천에서 아현국민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게 되었다.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서울대학교 64학번으로 공대 기계공과에 입학하였다.

직장생활

서울대학교에서 석사과정 중에 무예건설의 냉난방 관련 설계 Project 수행하여 서울대학교 병원의 냉난방 설비 구축에 기여를 일이 있었다. 석사 학위 취득 특수간부로 지원하여 군대 조교수로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군대 제대 조금 전에 친구의 소개로 만나던 현재 아내와 결혼하였다. 군대 제대할 즈음에 한창 불었던 유학 붐에 편승하여 1975년에 미국 UCLA 도미, 박사학위를 취득함과 동시에 1980 9 Union Carbide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Union Carbide 인도회사에서 일어난 사고로 회사가 휘청하게 되고 분할하여 매각할 수밖에 없게 되어 화학 부문은 Dow Chemical 매각되어 합병된 회사에서 계속 일을 하였다. Dow Chemical 출신 회사 직원들의 점령군 행세에 따른 횡포가 심하여 사표를 내고 2003년에 LG 화학으로 이동하였다. 1 정도 근무 다시 도미하여 Sunoco에서 일을 하다가 Saudi Arabia회사인 Sabic으로 옳겼다. 휴스턴에 본사를 두고 있어 뉴저지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하다 팬데믹 이후로 재택근무를 많이 하고 있다. 70세가 넘은 나이임에도 아직 현역에서 일할 있다는 것에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화학분야 전공

UCLA에서 공부할 지도 교수 Eckert Boelter라고 하는 석학으로부터 Heat and Mass Transfer 분야의 전공을 하며 가장 어려운 과목에서 A+ 받는 열심히 노력한 덕에 Union Carbide라고 하는 세계적인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고 경력이 밑받침이 되어 Sabic이라는 세계 굴지의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있었다. 매번 회사를 옮기는 때에 해다 헌터 회사에서 먼저 연락이 와서 Transition기간에 공백기간이 거의 없이 가능했던 것은 운도 따랐지만 나의 전공분야가 업계에서는 희소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석유화학을 석유 자원 추출의 Upstream부문과 석유 추출과정에서 생성되는 부산물을 취급하는 Downstream부문으로 구분하였을 나는 Downstream 부문을 취급한다. 폴리 에스터 제품 등이 환경문제에 상당히 많은 부분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 제품들을 취급하는 나로서는 일정부분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현재는 여러 정부에서 석유화학제품의 재활용부문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 지는 것을 보며 상대적인 위안감을 가지게 된다.

결혼

고등학교 동창과 등산을 가끔 같이 다녔는데 등산그룹에 여자들이 합류하게 되고 여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에 동조한다는 명분으로 함께 등산을 하는 가운데 현재 아내를 만났고 여러 번의 등산을 통하여 연애하고 결혼하였다. 나의 아내는 첼로를 전공하는 음대생이었는데 결혼이후 장모님이 한국에서 첼로 공부에 들인 돈이 아까우니 미국에서 첼로 공부를 보라는 권유를 한칼에 거절한 것이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고 한다.

자녀 취미

아들 2명과 1명이 있는데 아들만 결혼하였고 아직 손자/손녀는 없다. 자식들에게 악기를 권유하여 보았으나 조금 하다가 그만 두고 오래 하지 않아서 포기하였다. 취미로 산에 오르는 것을 즐기고 한국 뉴스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듣고 보기를 꾸준히 하고 있다.

 


This topic was modified 3 months ago by 김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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