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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민의 삶” 법대 55 /골든클럽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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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필
(@keiusain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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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ned: 1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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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 starter  

나는 아버지 정인목(부산상고, 명치대학) 어머니 황차수(경기여고, 동경여자대학) 사이에 6남매중 다섯번째 4남으로, 부친이 대학 졸업 후 첫 부임지인 경남 함안군 칠언면(일제 당시 금융조합 이사) 에서 출생했으나, 1년후 부친의 전근으로 거의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그래서 밖에서는 서울말, 집안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10세에 해방을 맞이한 바 현존하는 한인 생존자 중 우리 세대가 일제로부터 모든 수난과 고통을 겪었고, 또 보고 들은 산 증인으로 남아있는 무리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1949년 타 학교에 비하여 학비가 적은 서울대학교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특차로 입학하였다. 1950년 6. 25 때는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성북동  친척집(위장이 잘 된 집)에서 아버지와 형들은 북한군에게 들키지 않고 지낼 수 있었고 제일 나이가 어린 나는 낮에 필요한 식품을 구해오는 역할을 어머니와 함께 도맡아 하게 되었다.  

서울사대부속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법과대학에 지원한 13명이 전원 합격하였고 동기생중 한 명은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입학한 때도 있었다. 물론 타 대학 입학율도 좋았다. 당시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의 명성이 ‘천하부고’ 답게 얼마나 대단하였나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청년시절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할 당시1960년에 4.19 혁명이 있었다. 첫 직장으로 대한중석에 입사하여 근무 중 1961년에 5.16 군사혁명으로 퇴사하고, 다음은 문교부 해외 협력관으로 ‘해외 유학생 지도교수 위원회’의 간사직도 겸임하면서 해외유학생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였다. 유학생 시험(영어, 국사)학비 송금 허가, 미국 대학으로부터 의뢰해온 장학금 배분 등의 업무를 하게 되었다. 

직장에서는 거의 매일 대부분 부유한 집안의 유학을 가고 싶어하는 자녀-선남 선녀들과 그 부모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그 중 한 미인(유학 희망자)의 소개로 그 동생과 교제, 

약혼,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 후 보다 안정적인 직장인 국제화학 서울사무소의 무역 및 영업담당 과장으로 이직하였고 여행사의 영업이사로도 일을 한 바 있다. 결혼 후 2명의 딸을 낳고 살던 중 1974년 이미 미국에서 살고 있던 나를 중매한 처형네의 형제 초청에 의한 이민 신청을 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부조리에 대한 반발이 이민을 결심하게 된 동기가 된 듯하다. 거기에 자녀교육 문제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불과 거의 6개월만에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1인당 150불씩 총 600불만 지니고 왔는데, 당시 큰 딸이 8살이고 작은 딸이 4살이었다. 뉴욕에서 이미 자리잡고 있던 친구의 도움으로 이민생활 시작 몇개월 만에 뉴욕의 3대 흑인지역인 자마이카에서 작은 잡화상을 시작으로 그 후 

패스트푸드 가게 및 남자 옷가게를 추가하여 동시에 세 가게를 운영하였다. 원할한 관리를 위해 Manager를 두고 운영하게 되어 대외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겼다. 

A폭동 이후 흑인들과 한인들 간에 갈등이 뉴욕에서 상당히 심하게 표출이 되던 시기가 있었었다. 흑인들이 한인상가 앞에서 영업방해를 지속적으로 해서 한인들에게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흑인들의 지도자들을 만나 한인상가의 주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흑인들의 요구사항인 약간의 생계비와 일자리를 마련하여 주도록 하는 등 중재자의 역할로 갈등 해소에 힘썼다.  

그 당시연례만찬 형태의 모임을 시작하였다. 극장 등의 장소를 빌려 총영사, 지역 주요 인사 및 흑인 지도자, 단체장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생활용품 등을 나누어 주고 친교를 통해 다민족간의 화합을 도모했다. 그들의 행사때 와인이나 선물을 갖고 가서 유대 강화에도 힘썼다. 그런 영향으로  자마이카 지역의 한흑갈등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었다. 

1988년에는 사대부고 동창회장을 맡아 동창회 활성화에 기여했다. 

사회 활동으로 뉴욕한인봉사센터 이사장 재임 때 한 가지 특기할 것은 당시 사무총장이던 김광석씨와 뉴욕시의 토지, 건물 경매 입찰에 참가하여 토지 한 필지를 낙찰(22만불) 받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당시 봉사센터에서 운영하던 경로회관은 한 한인교회의 친교실과 주방을 사용하고 있다 보니 자체 건물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그 후 그 필지를 판매한 대금(200만달러)이 궁극적으로는 현 봉사센터(현 KCS) 건물을 매입하는 종잣돈이 된 것이었다. 이 공로로 “VISION AWARD” 상을 받았다. 

또 뉴욕시의 청소년 및 지역개발국(DYCD)의 시민권 프로그램 책임협력관 및 이민자주도부 협력관 역할을 통해 한인은 물론, 뉴욕의 다인종들을 대상으로 봉사함으로써 봉사 spectrum을 넓히기도 하였다. 주 업무가 언어소통이 어려운 이민자대상 시민권 신청 무료대행이었다. 8년 근무기간중 5,000건(한인 포함)이 넘는 실적과 함께 소수 민족을 위한 뉴욕시의 공공혜택 안내서 한글판 책자 발간(모금을 통한 자금 조달) 배포 등으로 뉴욕시 공익옹호관으로부터 

  

“Extra Ordinary Citizen of the city of New York((최우수 뉴욕시민)으로 선포문(Proclamation)을 받기도 했다.  

뉴욕, 뉴저지 유권자센터(현 시민참여연대 KAVC)의 자문위원장, 이사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주 업무는 유권자 등록. 각 교회’ 행사장(추석 잔치 등)에 직원들과 나가서 많은 실적을 쌓았다. 특기사항은 미 하원에서 소위 ‘일본국 위안부 하원결의 121’을 의결한 것이다. 유권자센터 이사장 당시 교포 기구인 ‘하원결의 121 뉴욕추진연대’의 공동의장으로 본 결의를 위해 대형버스를 대절하여 한인 노인, 성인, 청년 봉사자들을 싣고 10여차례 DC의 미 의사당에 새벽에 출발하여 거의 자정 가까이 돌아온 일도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의사당에서는 미리 조를 짜서(2-3명씩) 유권자 등록서 사본 뭉치를 들고 지역구 별 하원 의원실을 돌면서 결의 동참, 권유를 하고 돌아오면 거의 밤 12시가 되곤 하었었다.  

이 일을 완성하기까지는 10회의 버스 대절, 세끼 식사대 뿐 아니라 의회 전용 신문 광고료, 생존 위안부 노인 중 가끔 1-2명을 미국에 초청하는 비용 등을 마련하는데 소요되는 모든 자금을 조달했다. 본 결의를 성취하는데는 일본 태생인 Mike Honda 의원의 적극적인 도움이 컸다. 유권자센터에서 그에게 공로패를 주었고 재선, 3선을 위한 모금행사도 개최한 바 있다. 

급기야 결의가 통과되었으나 일본 측에서는 여전히 수년간 사과하지 않고 있어, 뉴저지 팰팍 소재 공공도서관 부지에 미국 최초로 ‘위안부 기림비’를 별도 모금하여 건립하였고 아직도 그 곳에 자리잡고 있어 역사적인 2차대전 당시 일본인의 야만적인 여성 인권 유린에 대한 실상을 후세나 세계시민들에게 알리는 교육적 측면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다. Mike Honda 의원으로부터 의회 공로패 ‘Special Congressional Recognition'를 받은 바 있다. 

그리고 한글학교를 설립 및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또한 ELCOS (엘름허스트 커뮤니티센터) 설립 및 이사장으로 인근 뉴타운 H. S. 학생과 지역 주민을 위한 SAT 및 영어, 배구 교실 또는 ME & Mom 프로그램 등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활발히 한 바 있다. 지역구 하원의원과 주 상원의원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한빛 상담실도 설치해 교인과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무료 상담 및 지역 봉사도 하였다. 

서울사대부고 뉴욕동창회에 장학회를 설립하기 위해 한국 모교에 나가 당시 교장/교감선생과 MOU를 체결하고 매년 모교 졸업예정자 2명에게 1인당 1,000달러씩 장학금을 보내주기로 하고, 지난 8년간 펜데믹 기간 중에도 중단없이 지원하고 있으며 금년에도 12월에 2,000달러를 송금할 것이다. 미 동부지역에 온 모교출신 유학생과 동창회원 자녀 손에까지 확대 시행하고 있다. 

한인사회 연구재단(RFKC) 공동 설립자 겸 초대회장에 이어 현 이사장으로 뉴욕한인회로부터 ‘올해의 한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RCKC의 주업무는 재외한인사회연구소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으로 지난 10년간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여러 책자와 매년 3-4회 세미나 개최 비용 및 박사학위 중인 한인학생 장학금 수여 등 한국 정부 미국정부 및 이민자를 위한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 보급하는데 크게 힘썼다. 

RFKC에서 Queens College의 점심을 못 먹는 학생들을 위해 5,000달러를 지원한 바 있다. 

본인이 소속된 미주한인 OO 교회 미주 총회가 매년 미 주요 도시에서 개최시 시무장로로 장립 이후부터 은퇴 전까지 거의 매년 동부 지방회 및 총회 대의원 자격으로 참가, 각 부서의 주요직인 인사부, 심리부, 법제부, 조정위원회, 심판위원회 등의 서기로 선임되어 교단 정상화와 발전에 기여한 바 있다. (* 참고: 본 교단의 헌법에 의하면 각 부서와 위원회의 장은 목사만이 될 수 있고 장로는 서기(부서의 차장 격)로만 기여할 수 있게 되어 있음) 동부지방회 장로회와 미주 총회의 전국 장로회를 설립하여 초대회장으로 각각 다년간 봉사하였였다.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한국 교단과 미주 교단의 통합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양 교단의 헌법을 개정해야 될 필요에 따라, 미주 대표단 13명이 한국 총회에 가게 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 미주 대표 13명 중 12명이 각 부서장인 목사들이었고, 장로는 본인 혼자였다. 최종 합의문 작성 때는 본국과 미주 대표단에서 각 2명씩 선발했는데(목사 장로 각 1명) 미주 대표단의 장로대표로  선임되어 역사적인 통합합의문 작성을 함께한 일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로 여겨진진다. 

70세 정년 은퇴시 원로장로로 추대돼 현재는 뒤에서 교회와 교단을 돕고 있다. 

 

가족 소개(딸 자랑) 

지면관계로 가족 소개를 다 하기는 어렵지만 그 중에 한명-미국올 때 4살이었던 둘째딸 Nancy에 대한 소개를 잠깐 하려고 한다. 이민 초기에 우리 부부는 흑인촌에서 세개의 가게를 운영하느라 눈 코 뜰새없이 뛰고 있어, 아이가 유치원에 갔다 오는 시간과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거나(손이 닿지 않음) 아파트 문을 혼자 열 수가 없는 이유로 힘이 부족) 누구든지 이 아이를 보는 사람은 좀 도와 달라는 쪽지를 그의 목에 걸 수 있게 해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다가 수 개월 후 그 시간에 맞추어 베이비시터를 구한 후에야 그런 일을 중단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한 곡예를 한 것인지 몸이 오싹할 정도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중학교부터 뉴욕의 명문사립학교에 입학시켜 교육받게 하고 대학 졸업후 Fulbright Scholar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또 본인이 한국을 선택하여 1년간 한국 법원 및 몇 기관에서 연수를 받은 후 Georgetown Law School을 거쳐 변호사로 근무한 지가 20여년이 되었다. 이번에 동그Law Firm 뉴욕지사의 총 관리책임자(Managing Partner)가 되었다. 뉴욕 지사 개설 이래 110년만에 여자가 책임자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우리 회원 자녀 손들에게도 귀감이 될 듯하여 소개해 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Google Search에서 Nancy Chung, Sidley에서 볼 수 있다. 

큰 수술(심장-4회, 위장, 소장, 전립선, 낙상사고 등)을 위해 10회나 엠브랜스에 실려 응급실로 향한 위급한 상황을 치르고도 아직까지 연명하면서 나름대로 남을 도울 수 있게 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무엇보다 항상 옆에서 지켜보고 전적으로 희생과 협조를 아끼지 않고 고비 때마다 나의 이상상태를 먼저 감지하고 응급차를 불러 발빠른 조치를 취해준 집사람이 가끔 천사(?)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지난해 결혼 60주년을 보냈다. 

가정의 우애와 화합, 그리고 건강과 형통을 안겨주심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항상 즐겁게 암송하며 묵상하는 성결 구절은 시편 23편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중략) 

주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후략) -아멘- 모두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This topic was modified 3 months ago 3 times by 김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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