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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규환 회원 (사대60)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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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규환 회원 (사대60)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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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필
(@keiusain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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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ned: 1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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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1939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태어나 신학문 보다는 유교적인 한문을 중요시 여기시던 부친의 영향으로 동몽선습, 격몽요결을 배우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1945  해방 후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  싸움을 하던  1948년 풍기국민학교 4학년때  교실밖에서 군인들이 공비들의 목을 잘라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충격적인 상항을 보기도 했다.  1950년부터 1953년 까지의 한국전쟁 당시에 피난을 가지 못하여 인민군들과 같이 지내는 시간도 있었고 종전시에 휴전을 반대하는 데모에도 참가하였다.    

청년시절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안동사범학교에  다닐때 신문배달을 하면서 힘들게 졸업을 하고 18세에 풍기국민학교 교사를 시작하였다.  1959년 교사생활 말기에 본의 아니게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 전초병이 되어  학생들의 가정방문을 통하여 선거 시 여당후보를 찍으라고 강권하기도 하였다.  1960년 대학입시를 보러가면 근무지 이탈로 파면을 각오하라는 이산국민학교  교장의 협박을 물리치고 시험을 보고 합격하여 대학생이 되었고 419가 일어난날 경무대 앞까지 데모하는 군중의 일원으로 참여 하였다. 1964년 대학졸업후 ROTC 2기로 2년 군복무 기간 중 건강이 좋지 않아 대구 제2육군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대구 공군기지에 근무하는 친구 덕분에 대구-여의도 간의 수송기를 타 보는 새로운 경험을 뒤로 한 채 군복무를 끝내고 196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복학하였다. 대학원 시절에 국립맹아학교 고2  강영우의 가정교사로 수학을 한두달 가르쳤는데 점자로 받아쓰면서도 이해가 빨라서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  

유학시절

1968년 대학원 졸업후 미국유학을 위하여 영어회화 공부를 할 때 백인 여자선생의 미모가 아주 뛰어난 것이 기억에 남는다. University of Minnesota에서 화학과 Graduate과정을 하는 중인 1969년에 화학과 건물 3층에서 나는  총성을 듣고 실험실 복도에 피가 보이는 급박한 사건을 목격하였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사건 이후 가해자인 여학생은 연구를 계속하고 피해자인 남자교수는 목덜미에 붕대를 감은채  영국으로 돌아가 특별한 Issue가 없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University of Minnesota에서 박사과정을 거치기 위한 관문인 Preliminary Exam을 거듭 실패하여 쫒겨나게 되었는데, 나의 답안지에 대하여 채점도 하지 않고 낙제를 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참담하고 억울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70 University of Detroit로 옮겨와 박사과정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박사과정을 마칠때쯤 지금의 아내를 만나 1974년 결혼하게 되었다. 박사과정을 마친 후 Canada University of Guelph에서 Postdoc 기간에는 화학분야의 새로운 경지를 연구하였다.

한국 교수 시절

1976년 이화여대에서 교수 초빙을 받아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님과의  만남은 인상이 깊었고1981년 부터 모교인 서울대학교 화학교육과로 옮겨서2005년 정년퇴임까지 캠퍼스에 박혀 살았다. 10.26전후와  군사정부 시절의 캠퍼스는 학생데모로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구속된 학생을 석방할때는 반드시 지도교수가 찾아가서 데려오는 관습이 있었다.  어떤 한 해의 사은회에서 여학생 가운데 한명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1987Urbana Champaigne Illinois University 교환교수로 갔을 때 Northern Illinois University교수로 재직하던 강영우 박사가 교회 부흥강사로 오게 되어 오랜만에 재회하는 기쁨을 누렸다.

미국 생활

1968년  9월 미국 유학 출국시 Fullbright Travel Grant를 받은 것이 한국으로 귀국하여야 하는 족쇄가 되어 한국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아내는 이민 1세로 미국생활에 더욱 애착이 있는 상황이었다.  나의 정년 퇴임 4-5년전에 자녀들의 대학원 유학때문에 가족들은 미국에 먼저 오게 되었고 나는 정년퇴임 후 미국으로 이민와서  살게 되었다. 2011년에는 Yellowstone National Park Cafe에서 두달 동안 일하면서 노동의 신선함을 맛보는 색다른 경험도 하였다. 2018년부터 골든클럽 컴퓨터 교실을 열심히 다니고 있다.

신앙생활

1989년 막내 딸이 아토피로 심히 고생을 하고  있어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내가 대신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방언의 은사도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아내의 오랜 기간 동안의 기도의 응답이라고도 생각한다. 1990년도부터 서울대교수들의 교수기도회/성경공부 모임을 매주 꾸준히 하였으며 서울대 총동원 전도집회도 가졌으며 1999년에 서울대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협조하였다. 2006년 과천 한샘교회에서 장로 직분을 받았다.  

자녀들 아내

3남매(, 아들, )의 자녀가 있다. 나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념으로 큰 딸과 아들은 한동대를 졸업하였다. 두 딸들은 미혼이며 큰 딸은 약사로 일하고 있고, 작은 딸은 오하이오 주립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한의사로 일하며, 아들은 하바드와 컬럼비아를 거쳐 뉴욕주정부에서 건축사로 근무한다.  슬하에 손자 2명이 있다아내는 임상 영양사로 DOJ 및 요양원 등에서 오랜 동안 일했고 현재도 Part Time으로 Bronx에 소재하는 장애자들을 위한 시설의 식품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김병순 취재)


This topic was modified 3 months ago by 김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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