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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를 넘어선 도전과 성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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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를 넘어선 도전과 성취 - 이강홍 (상대60) 20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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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필
(@keiusain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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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ned: 1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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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린시절이지만 일제강점기 시기에 모친과 함께 부친을 만나기 위하여 모친과 함께 만주까지 여행한 것은 기억이 생생하다. 625 한국동란 시절에는 서울에서 북한 공산 치하에서 끔찍한 경험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북한 공산당에 의하여 형을 잃은 사건 등의 참담한 경험담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조금 더 자세히 언급하기고 하고 북한군 내무서원과 토착빨갱이로 부터 부친이 심한 고초를 당하여 거의 폐인이 되어 요양하느라 국민학교의 4학년에서 6학년까지 학교에 다니지 못하였다가 서울로 복귀 후 6학년으로 편입하게 됨으로 인하여 학교 공부를 따라잡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기억이 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 후 졸업하면서 미국에 Stanford 대학교로의 유학준비를 모두 마쳤는데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입할 403달러가 없어 난관에 봉착하였다.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형님이 집안을 이끌어 가고 있었고 비행기표 비용을 형님에게 부탁하는 말을 할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 나의 힘으로 미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Time지와 Readers Digest를 통하여 독학으로 터득한 영어 실력으로 미국대사관 참사관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분을 통하여 당시 월남전 참전한 미군 병사들을 본국으로 운반하는 비행기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고 그 당시 일본은 한국인이 가기는 더욱 힘들어 특별한 방법을 모색하여야 하였다.

일본으로 배를 타고 다소 수월하게 갈 수 있는 방법으로 해운회사를 입사하여 일정기간 근무 후 해외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보자는 심산으로 극동해운에 들어 가게 된다. 당시에 서울대학교에서는 지원자가 적었고 연대/고대 출신들이 많이 들어 가는 상황이었으나 내가 지원하였을 때는 1명을 채용하는 경우였는데 Maryland 대학교 청강생으로의 경험 등에 힘입어 운 좋게 합격하게 되었다.

극동해운의 소유주였던 남궁연 사장님은 자유당 시절 한국에서 상당한 재력가로 해운뿐 아니라 철강업에도 종사하였고 조선공사를 인수하여 공사내에 있는 철강부문으로 사업상 시너지를 몰고와 상당히 성공적으로 사업을 영위하였고 심지어 미국 알래스카 파이프라인 공사를 수주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고 비록 실패하였지만 스케일이 큰 사업을 하던 기업가였다. 극동해운에서 남궁연 사장님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정치권 유력인사 로비 및 외국의 사절이나 유명 기업인들의 접대를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금지 구역이던 비원을 구경 시켜 주는 청와대의 일까지 하는 아주 다양한 경험을 하며 남궁연 사장의 신망을 크게 얻어 29세에 전무 직함을 얻을 수 있었다.

미국의 Samsonite에서 동양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Licensee Manufacturer를 영입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얻고 과감히 여태까지 누리고 있던 여러가지 혜택과 지위를 내려 놓고 그 일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샘소나이트 현지 공장을 서울에서 시작하여 스리랑카, 아일랜드 로 확대하여 건설하였는데 그 모든 공장을 지어 영업이 본 궤도에 오르기까지 불철주야로 일하였고 나중에는 일년에 절반 정도를 외국에서 생활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리랑카 지사를 건설하였을 때에는 보안 등 여러가지 이슈로 싱가포르에 거주하게 되었다. 싱가포르에 살면서 토속 말레이 계통의 국왕의 존재와 인도계의 대통령의 존재 및 이광요 수상의 치적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정신없이 일에만 몰두하고 있던 시기의 한 날에 작은 아들의 한마디에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여러 나라에 걸쳐 영업을 하고 있던 제조업을 그만 두고 가족들과 함께 살려는 계획으로 미국에 터전을 잡을 수 있는 미국 골프장을 건설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골프장을 건설하기 위하여 Gary Player와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전세계 430여개의 골프장을 설계하였지만 세계에서도 가장 큰 중심금융도시인 뉴욕 인근에는 본인의 작품이 없어 크게 아쉬워하던 터이어서 쉽게 인연을 맺을 수 있어 다소 쉽게 그의 Design허락을 받을 수 있었고 Manhattan Woods Golf Club을 건축할 수 있었다. 1994년부터 대지 매임, 골프장 인허가(영방정부, 주정부, County, 지방정부 등 16개 정부 부처의 인허가가 필요) 등을 거쳐 1998 9 22 Grand Opening을 할 수 있었다. 인허가를 받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한국과 달리 뇌물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어서 금전적인 비용은 많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골프장 운영은 아주 노력이 많이 필요하였다. 로고를 Design하는데 5개월이 소요되고 식당의 Menu를 만드는 과정에도 커피를 어떻게 혼합 제조하는 것이 좋을 지 등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관심을 쏟는 과정에는 설계자인 Gary Playe가 자기의 의견보다 나의 의견에 양보한 덕을 잊지 못한다. 22년 동안  골프장 운영을 한 이후 두 아들에게 물려주려 하였으나 그 들이 마다하여 2000년에 제 3자들에게 매각하고 현재는 Founder로써 평생 회원권만 보유하고 있는데 다소 아쉬움이 남아 있다.

나는 집을 직접 지어 보는 것을 좋아하여 여유돈이 조금 생기면 여러가지의 원천을 통하여 영감을 얻어 다양한 형태의 집을 지어 보았다. 한국에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나의 집은 건축가 김중업씨의 작품인데 독특하여 유명한 건축물이었다. 김중업씨는 프랑스의 사를르 드골 공항을 설계한 Le Corbusier(르 꼬르비지어)의 제자였는데 한국적인 색채를 담아 가벽돌로 건축하여 건축학도들에게도 유명하였고 대우자동차에서 신차가 나왔을 때 그 집을 배경으로 선전 화보를 찍었고 내가 매각한 이후 외국의 유명 회사의 한국지점장들이 살게 되기도 하였다.

샘소나이트 한국 지사의 근로자 기숙사 건물도 그 당시 신식으로 근로자들 복지에 신경을 많이 써 지은 건물로 박정희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Manhattan Woods Golf Club의 바로 옆에 대저택을 지었다가 Sotheby 경매장을 통하여 매각이 되는 등 유명한 건축물을 지어 본 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긍지가 되었다. 성수동에 샘소나이트 본사 건물을 지을 때 영국에서 공수하여 온 시계탑은 신혼부부들의 Photo Spot으로 활용되고 있다.

Who’s Who in the World에 이명박 전대통령과 나란히 나의 이름이 나오고 Who’s Who In  America에 나의 탄생에서 여러 사업상 이력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나 스스로에게 칭찬을 한다.  

군대는 해병대를 제대하였는데 회사를 운영할 때에도 대한민국을 지키는 군인들에 대한 노고를 기억하여 위문품을 매년 보냈는데 한국군대 중 가장 외진 곳으로 고생이 많은 27사단을 선택하였다.

나의 아내는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하였는데 내가 한 때는 미대를 가서 그림을 그려보고자 하는 꿈이 있어 장충공원에서 하는 미술 Class에 들어갔을 때 아내를 만났다. 연애를 할 때 통금시간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밤 늦은 시간에 아내가 보고 싶어 청와대의 힘을 빌어 만난 일화가 생각이 난다. 차편이 이미 종료된 시각에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거짓 구실로 청와대 앞에서 비상시 대기하고 있던 군용 짚 차를 타고 처가집에 가서 나의 아내를 만나고 처남방에서 자고 오는 해프닝을 일으켰다. 처가집에 있던 시원치 않은 개와 우리 진돗개를 바꾸어 주어 처남을 내 편으로 만들어서 아내와의 연애와 결혼이 원활히 행하여 지게 되었다.

아들이 2명이 있는데 내가 영위하던 골프장 사업을 물려 받기를 거부하고 각자 다른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두 명 모두 한국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데 큰 아들은 부동산업에 작은 아들은 Smart Farming에 종사하고 있다.     


This topic was modified 3 months ago by 김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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