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는 우리 그리고 두 딸 가정에 경하할 만한 일이 많이 있었다. 우선 우리 부부는 올해가 결혼 60주년을 맞는 해이다. 큰딸 집 맏손녀가 로스쿨 졸업, 변호사 자격 취득 후 뉴욕의 대형 law firm에 취직이 되었다. 둘째 딸 집의 쌍둥이 손자들은 둘 다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 합격하였다. 또 둘째 딸은 굴지의 law firm NY Office의 Managing Partner로 발탁되었다. 이런 좋은 일들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온 가족 (모두 10명)이 같이 가족 여행으로 한국과 일본을 3주간 동안 다녀오기로 결정하였다.
여행 준비의 일환으로 나의 몸 상태가 긴 해외 여행을 감당할 수 있는 확인을 해야 했고 나를 두번씩이나 심장 수술을 했던 Dr. Singh 으로부터 세번에 걸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최종 결과 허락은 받았으나 극히 조심해야 한다는 딱지를 붙인 체 이번 여행에 오르게 되었다. 총 일정은 한국에서 13일, 일본 (Kyoto와 Tokyo)에서 4일 그리고 왕복 2일 모두 19일의 대장정이었다.
이번 서울 방문은 7년만이었다. 7년 전에 비해 더 많은 아파트가 들어선 것 같고 특별히 첫 숙박지인 잠실의 롯데 호텔은 높이가 101층으로 한국에서는 제일 높은 빌딩이다. 시설이나 장비가 모든 것들이 거의 완벽하다. 이전에는 광화문에 있는 Four Season Hotel에 투숙하였었으나 그 당시 세월호 데모의 기억때문에 이번에는 강남 잠실에 있는 이 곳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나는 원래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났는데 형제들 내외 12명 중 현재 생존하고 있는 분은 두째 형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그리고 나만 남았다. 여동생, 그의 장남인 조카를 먼저 해후를 하고 식사도 같이 하였다. 아쉽게도 형수님은 치매기가 있다고 해서 만나 뵙지는 못했다. 그 대신 여러 집 조카들과 조카 손주들 까지도 차례로 만날 기회는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바로 위 형님의 큰딸은 거의 처음부터 떠나 오는 날까지 집사람에게 ‘아빠’ ’엄마’ 하면서 시중을 들고 식당 등 안내, 접대를 해주어 고마웠다. 준 재벌 정도 집의 며느리로 그룹회사의 회장직도 몇개 가진 것 같아 흐뭇했다.
의사의 권고 또 두 딸의 강권으로 나와 집사람은 공항에서는 휠체어로, 일반 관광 때도 타고 다니던 벤에 항상 휠체어를 실었고 좀 먼 거리, 언덕길은 가이드가 끄는 휠체어를 타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일정이 마침 한국과 일본의 우기인 것 같았고 실제로 제주도 여행은 떠나려던 날에는 장마가 제주도로부터 시작되었고, 비행기가 출발하지 못하고 3일 내내 제주도의 일기 예보가 폭우로 기록되어 있어 부득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도착한지 3일만에 목이 칼칼해 지면서 잔 기침과 가래가 끓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목소리까지 없어지면서 참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서울의 공기 오염도도 나쁘지만 역시 면역력이 가장 약한 나에게 온 것이리라. 숙희 조카가 자기가 사는 아파트 내에 있는 친근한 이비인후과에 인도하여 갔는데 놀랜 것은 그 아파트 단지에 3,500 동의 입주자들을 위한 병원을 비롯한 각종 업소 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안내판을 볼 수 있었다. 예약 없이 들어간 의료실에 의사가 간단한 기구로 목 검사를 하더니 약물로 닦아 낸 후 링거를 한 30분 정도 놓아주고 5일분 약봉지를 주고 하루에 세 번씩 먹으라고 했다. 마이신 계통약만 식별할 수 있고 다른 약들은 이름도 모른 채 5일 동안 복용하니 가래는 점점 엷어지고 닷새 후에는 거의 완치가 되었다. 미국 병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부터 나는 대강 오전에 한 두 군데만 돌아본 후 점심은 밖에서 먹고 호텔로 돌아와 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동안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광화문, 경복궁, 국립 중앙박물관, 북촌, 홍대 앞, 강남의 명소들을 많이 돌아보았고 특히 아이들은 밤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줄 곳 나가서 밤 12시가 넘어야 호텔로 돌아오곤 했다. 특히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이 좋다 한다. 가장 어린 이번에 대학 갈 쌍둥이 손자는 내년 여름방학을 기하여 한국으로 어학 연수를 위하여 다시 오겠다고 할 정도다.
몇일 후 광화문 쪽에 데모가 거의 없다는 소식을 접하고 교통이 편리한 Four Season Hotel로 숙소를 이동하였다. 법대 동기생 3명을 호텔로 초청하여 식사를 나누었다. 그중 2명은 직접 만난 것은 졸업 후 처음이지만 10여년 전부터 카톡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 교신을 해오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법대뿐 아니라 사대부중. 부고 동기 동창이다. 이외에도 꼭 만나고 싶었던 동기생이 두 명 더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모두 근년에 작년에 작고하여 만날 수가 없었다. 그들 얘기와 그칠 줄 모르는 추억담으로 회고 한 후 아쉬운 가운데 헤어졌지만 그래도 아쉬워서 와인 한 병씩을 구입하여 택배로 보내 주었다.
일본의 첫 기항지인 교또는 천년 이상(794-1869) 일본의 수도로 아주 고풍스러운 도시이다. 도착하는 날부터 극심한 설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가이드가 일본 약국에서 정로환이란 약을 사와서 반신반의하고 이틀을 먹었더니 기적같이 멈췄다. 그래도 다리에 기운이 없고 한참 앉았다가 일어나면 약간 어지럼 증상까지 있어 주로 휠체어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교토의 첫 인상은 한국에 비하면 별로 발전한 것이 없어 보이고 도로는 주로 2차선이고 조용한 도시의 풍경이며 고층빌딩이라야 겨우 3-4층 정도 (아마도 잦은 지진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며 거의가 단층집이 대다수인 것 같았다. 거리에 쓰레기 통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일본 사람들은 길 거리에 담배 꽁초나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일찍이 외국 문물을 받아 드린 소위 명치유신으로 개화되기 시작한 반면, 조선은 대원군의 집정 당시, 쇄국정책으로 외국 선교사들의 입항마저 금지하고 심지어 천신만고 상륙한 선교사나 천주교 신자를 처형해 선진 외국 문화를 오랜 동안 받아드리지 않음으로 양국이 극명하게 다른 체제로 돌입하게 됨에 따라 급기야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이씨 조선이 최후를 맞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집안에 있는 돌, 나무 등 조차도 신으로 믿는 풍습이 있어 국내에 수십만개의 잡신이 있는 나라인데 하물며 일본의 발전을 초래한 명치유신이랴, 이를 기념하고 숭배하는 대형 신사가 있었고 그들은 아직도 그 곳에서 나오는 샘물은 만병 통치 약수라 믿고 전에는 약수를 마시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지만 현재는 물이 오염되었다는 이유로 손만 씻어도 병이 났고 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을 정도로 명치유신을 기념하는 이 신사에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교토에서 동경으로는 신칸센(Shinkansen)으로 이동하였다. 교토에서 동경까지의 거리가 368km인데 주행 시간은 중간에 두 곳 정차하고 2시간 15분이다. 이는 1964의 동경 올림픽을 위하여 건설되었다고 한다. 가는 도중에 농촌 풍경과 후지산의 경관을 목격할 수 있었다. 동경은 역시 대도시이기 때문에 많이 현대화가 되었고 한국에 비하면 대단하지는 않지만 고충 빌딩도 제법 있고 가 볼만한 곳도 많아서 나를 제외한 일행은 부지런히 다녔고 또 만끽하는 것 같았다
가장 인상에 남은 곳은 역시 왜식 집인데 우리가 간 곳은 좌석이 10명 밖에 없는 수시 바인데 우리 식구가 10명이라 그날 저녁은 우리가. 전세를 내게 된 것이다. 매인 이다바와 보조 한명이 서브를 하고 여성 2명이 뒤에서 접시를 바꿔주고 사께를 따라주는 등 써비스를 3시간 동안 하는 곳이었다. Appetizer 로 부터 시작해 후식까지 약 20 코스로 전복, 우니를 비롯한 각종 생선이 연달아 나오는데 나는 처음 절반 정도는 주는 대로 먹다가 후반에서는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어 한 점씩만 먹고 옆에 앉은 사위나 손자 들에게 남은 것은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돌아오니 숙희 조카가 한국에서 안경을 선물로 새로 해 주었는데 미국에서 검안서는 가지고 간 것이 있어서 쉽게 당일로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bifocal 로 하는 데는 시일이 최소 4일 정도가 소요된다고 해서 거리 조종만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집사람에게도 옷을 여러 벌 사준 것으로 안다. 이번 여정을 총 정리하고 또 기념하기 위하여 계획한 것이 가족사진첩이었다. 그래서 숙희 조카의 소개로 그녀의 친족 결혼식때 여러 번 이용했던 사진사를 고용하게 되었다. 촬영장소로는 신라호텔의 뒤 뜰을 주로 이용하고 있고 또 근 거리에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어 독사진과 가족 별 사진 등은 그 곳에서 촬영했다. 하루 오전에 촬영했고 그 후 딸들이 가서 앨범에 실을 사진들을 골라주고 왔다. 앨범이 완성되면 택배로 보내온다고 한다,
손녀, 손자들이 저녁 비행기로 미국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 굳이 할아버지가 다녔던 대학을 꼭 보겠다고 해서 법과대학은 없어지고 지금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으로 바뀌었고 또 캠퍼스 역시 옛 동숭동 캠퍼스에서 옮겼기 때문에 부득이 관악 캠퍼스로 갈 수밖에 없었다. 건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나는 쉬는 동안에 손자 손녀들은 부지런히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고 급기야는 서울대 모자 sweat shirts와 pendant를 기념품으로 샀다. 미국 집에 돌아와서야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쌍둥이 손자 둘만 같이 사진을 찍은 이유는 다른 두 손주은 이미 직장 출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스크는 내가 돌아오자마자 고열이 생겨서 COVID 자가검사를 했더니 양성으로 나왔기 때문인데 손자들이 “할아버지 같이 사진 찍고 싶어요.” 해서 마스크를 쓴 채 병원가기 전에 촬영한 탓이다. 모두들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게 됨 것을 감사드린다.
